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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책 & 만화

오늘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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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2007. 정이현 단편집. 문학과 지성사

타인의 고독
삼풍백화점
어금니
오늘의 거짓말
그 남자의 리허설
비밀과외
빛의 제국
위험한 독신녀
어두워지기 전에
익명의 당신에게


(2007.7 cyworld 다이어리에 쓴 글을 옮김)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반해 <삼풍백화점>을 읽었고,
<삼풍백화점>에 반해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이현' 이라는 이름만 보고도 망설이지 않고 책을 살 만큼 그녀의 글을 신뢰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긴다는건 생각보다 참 즐거운 일이다.

 열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정이현의 두번째 소설집. 단연 최고는 현대문학상을 받은 <삼풍백화점>이다. 지난번엔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려있는 걸 읽었는데 이번에 여기서 다시 읽게 되니 반가웠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는 아마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뉴스에 놀라서 일기장에 적었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관련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게 벌써 12년전 일이다. 시간 참 빠르다.. 그 땐 그저 놀랍고 무서웠을 뿐 다른 세계의 이야기마냥 실감이 안 났다. 그랬던 내가 지금 그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 근처를 맴돌고 있다니. 성수대교도 바로 이 근처인데. 어쨌든.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 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주말 저녁에는 증권회사 신입 사원인 남자친구와, 실제로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모범적 이성교제를 위한 데이트 매뉴얼’에 나오는 방식대로 데이트했다. 성실하고 지루한 데이트였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삼풍백화점> 中


 여기에 실린 <타인의 고독>은 이효석 문학상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문학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소설을 써내는 재능이 배가 아프도록 부럽다- 경쾌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블랙 유머. 시시콜콜한듯 하면서도 담담한 문체. 신선하고 매력이 넘친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의 도시인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었다. <비밀과외>에서 1985년에 14살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아이가 당시 탔던 2호선에는 한양대역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오늘의 거짓말>을 읽을때는 약간 소름이 끼쳤다. 주인공이 그랬듯, 나에게 옷을 주고, 밥을 주고, 이 책을 안겨준 것 또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환멸감. 나는 아냐, 나는 그런 속물들하고 달라, 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려고 해보지만 나도 역시 그 안에 있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나는 원래 한국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좁고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내 자신에게도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법한, 소름끼치도록 현실적인 이야기들. 피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일본 소설이나 프랑스 소설을 더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낯선 이름을 가진 그들의 낯선 곳에서의 이야기는 나를 안심하게 했다. 정도는 다를 지 몰라도
자기가 속한 곳에 대한 환멸과 냉소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능일까. 우리나라는 역시 안돼, 라는 무의식속의 자기비하가 한국 소설을 멀리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팝송보다 가요를 더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부터 외국 소설보다 한국 소설이 더 끌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모국어로 쓰여졌다는 것.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와닿는 문장들. 한국 사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소재와 정서. 이런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한국소설의 가장 큰 매력인듯 싶다.

 도망가지 말자.
모두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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