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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0921


 시급 5000원씩 받으며 고객센터에서 전화받는 일을 하고 있다. 나름 괜찮은 듯 하다. 몸도 많이 힘들지 않고, 정신적으로 압박받는다고 하지만 회사 특성상, 또 인바운드라는 특성상 그리 짜증날 일도 없다. 틈틈이 웹서핑도 하고 이젠 전화 받으면서 자기소개서도 쓴다. 피곤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 생활비에 대한 걱정도 훨씬 줄었고 무엇보다 엄마 볼 면목이 아주 없진 않아서 좋다. 물론 엄마가 나에게 공부든 취직이든 이러쿵 저러쿵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맏딸이 밥값은 하며 살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서 나름 기분 좋다.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알게 됐다. 엄마는 나만큼도 시급을 못 받으며 일하고 있단걸. 혈액순환이 잘 안되서 팔 다리는 자꾸 아픈데 엄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이지만 엄마가 그렇게라도 일을 해야 막내와 엄마가 한 달은 지낼 수 있다. 집에 돌아오면서 가만 생각해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왜 내가 엄마보다 돈을 더 벌 수가 있는걸까. 무슨 일을 해도 엄마가 나보단 잘 할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지 내가 나이가 어리고 대학이라는 곳을 겪어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취직을 하게 되면 난 엄마보다도, 예전의 아빠보다도 돈을 훨씬 많이 벌게 될 것이다. 결국 그건 2천만원에 육박하는 대학등록금을 쏟아부은 대가일까. 아빠의 아빠의 아빠의 아빠... 혹은 훨씬 예전부터 대물림되어왔을 그 허덕이는 삶이 싫어서 그렇게 공부를 악착같이 했던건데. 내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보다 중졸인지 고졸인지 궁금해하는 회사에 원서를 우겨넣고 있는 내가 싫다. 
 내가 지금 백수로 살고 있는 건 상관없다. 경제위기, 사회구조보다도 내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내가 읽고 싶어하는 책이라면 아낌없이 사주고, 한 번도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지 않고, 무리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저 날 믿어주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준 엄마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엄마 세대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맏아들과 스물네살이나 차이나는 다섯번째 딸.. 고등교육을 받을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공부를 하겠다고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갈만한 깡도 없었다. 그 세대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 정도의 각오가 있지 않으면 결국 돈 많은 부모 못 만난 죄로 그냥 그렇게 살아야 되는거다. 자기 집을 가져 볼 꿈도 못 꾼 채, 해외여행 가보고 싶다는 내 말에 '그래도 너는 나보다 살 날이 많잖아.'라며 오히려 위로하면서. 정작 엄마는 제주도 여행도 못 가봤으면서...
 정말. 성공하고 싶다. 나를 위해서, 우리 엄마, 내 동생들을 위해서... 그 '성공'이라는 것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지금이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일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진 않았으면, 그리고 언제든 우리 식구들에게 맛있는 밥 한 끼 마음껏 사줄 수 있었으면... 그냥 그것만으로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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