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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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nottome
2008. 12. 16. 23:10
1. 야호. 시험이 끝났다. 그런데 별로 기쁘지는 않다. 어차피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것도 단 며칠뿐이었으므로. '대학 와서 시험 공부를 이렇게 안 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아.'라는 생각을 매 시험마다 하는 것 같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 얼핏 본 노트와 프린트물에서 스치듯 읽었던 단어들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아직 온라인 과목 시험이 남아있고 졸업은 2월 말이긴 하지만, 내 4학년 2학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조금은 심심하고 쓸쓸한 하루였다.
보통 조교들이 시험 감독관으로 들어오는데, 가끔씩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다. 삐딱한 태도로 대뜸 반말을 하거나,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왔다갔다 하거나,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는 조교들. 어제랑 오늘은 같은 조교가 들어왔는데 어젠 시험 중에 '여보세요' 하며 전화를 받으며 걸어나가질 않나, 오늘은 학생들이 내고 간 시험지를 자기가 바로 들여다보면서 피식 거리고 옆에 있던 다른 조교에게 보여주며 쯧쯧, 하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비웃고. (나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한심한 답안을 써내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그걸 나무라는 건 우리를 가르친 교수님이면 몰라도 그 찐따같은 뚱땡이 조교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아, 인신공격해서 미안?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의평가 소감문에다가 또박또박 적어줘야지. 암튼 세상엔 졸라게 재수없는 인간들이 많다.
2. (이 부분은 길게 썼다가 나중에 지웠다. 그냥 나만의 이야기로 간직하기로 했다.)
3. 오랜만에 김혜리 기자의 블로그에 들렀다. 즐겨찾기 추가만 해두고 자주 가지는 않았는데 오늘 문득 생각이 났다. 언제 읽어도 차분함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이라 좋다. 인터뷰 기사로 유명한 걸로 알고 있는데, 몇 번 읽어본 바로는 인터뷰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바탕에 깔려있어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김혜리 기자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이렇듯 글을 읽으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하고 대충 짐작해보게 되는데 내 경우엔 아마도 날카롭고 불만투성이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쓴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도 나도 종종 따끔따끔할 때가 있으니 말야. 조금만 둥글어질 필요가 있다. 라고 적고 위를 보니 '졸라게 재수없는'이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4. '정글고'는 정말 재밌는 것 같다. 정식 제목이 뭐지? 입시명문사립정글고? 였던가. 어렵군. 예전에 누가 퍼온 걸 몇 번 본 적은 있는데 며칠 전에야 처음부터 최근것까지 전부 봤다. 참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니 실제로 있는 이야기겠구나. 과장되고 유머스럽게 그린 만화 속의 정글고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리 학교도 그런 구린 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교육은 없고 장사만 남은게 어제 오늘일이 아니니. 대학 와서 그걸 더 뼈저리게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다보니 학교로부터 혜택을 받은 게 꽤 되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역시 학생들로 돈벌이 하는 기술은 우리 학교가 최고다. 막상 떠나려니 아쉽기도 하지만, 막내에게는 여동생에게 그랬듯 우리 학교를 추천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전에 막내 성적이 안습.. 겨울방학맞이 특별과외다..) 암튼 불사조는 귀엽다. 역시 시크한 닭은 매력있어. 그래서 오늘 시험 끝난 기념으로 첨부터 한 번 더 본다.
5. 나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변 사람의 생일은 한번 들으면 잘 잊어버리지 않는 편이고, 특정한 날 있었던 일 같은 걸 오래 기억하고 있다. 딱 작년 이 맘때쯤 남자친구와 롯데월드를 갔던 게 기억이 난다. 고2때 친구랑 셋이 간 뒤로 놀이공원은 두번째로 가는 거였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걸 이루게 되서 신났다. 그냥 같이 손잡고 바이킹도 타고, 군것질 하면서 줄서서 수다도 떨고. 딱 그 나이쯤 할법한 상상이었던 것 같다. 폴더 속 사진을 뒤적여보니 그 전날에는 그 삼청동의 커피방앗간에 갔구나. 제일 안쪽에 있는 나무 책상 자리에 같이 앉았다. 마주보고 앉는 것도 좋지만 어쩐지 쑥스럽기도 하고, 옆에 앉아서 손도 잡고 귓속말도 하고 가끔씩 얼굴을 바라보는 게 제일 좋다. 그 날 마신 커피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친구가 노트에 그려 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기억난다. <이터널 선샤인>의 테마곡이 흐르고, 운전대를 부여잡은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원망하며 울던 그 장면. 남자친구가 갑자기 그 그림을 그려주었을 때 잠시 기분이 짜릿짜릿해졌다.
나는 <이터널 선샤인>을 정말정말 좋아한다. 사랑이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드라마나 영화는 더이상 반갑지 않다. 사랑에 대한 강박관념이 사랑을 더 지긋지긋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듯 해서. 싸우고 울고 욕하고, 혹은 변하고 결국엔 깨어질 수도 있는게 사랑이지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말대로) "그럼 뭐 어때? 괜찮아." 그리고, "Enjoy it." '지금'을 음미하는거다-
오늘따라 유난히 일기 주제가 왔다리갔다리한다. 일찍 자고, 내일은 짐을 싸야지-!